정독도서관의 여름 뜰

'정독‘이라는 어감은 어쩐지 좀 무겁다. 강한 받침이 연속될 뿐 아니라 혀뿌리가 목구멍을 탁 막으면서 나오는 소리로 끝나는지라, 여운도 없이 냉정하기만 하다. 더욱이 ’도서관‘이라는 좀 지루한 느낌의 단어가 이어지다보니, 이 공간은 참 무거운 공기가 흐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선다. 하긴 답사를 위해 찾은 일행들의 발걸음도, 혹은 잡지에 실을만한 장면을 찾아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도 좀 크게 느껴져서, 고요히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미안함이 느껴졌으니,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이 공간에도 그대로 스며있다는 생각도 틀리지는 않아 보인다.


스스로를 수형자로 여기고 마치 감옥에 갇힌 듯 공부에 열중하는 이들에게 바깥의 뜰은 어떤 의미일까? 삼십년도 더 넘은 고교시절, 새벽잠을 설치고 도달한 도서관 앞 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던 열일곱의 소년은 그 뜰을 기억하지 못한다.


바르게 읽는다는 뜻의 정독(正讀)도서관에서 중첩된 시간을 읽어내는 일은 즐겁다.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가 지금의 강남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터에 지어진 것이 오늘의 정독도서관이다.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당시 교사(校舍)로 쓰이던 건물들은 보수해서 도서관이 되었고, 학교운동장으로 사용되던 곳을 정원으로 만든 것이 이 뜰의 역사다. 도서관으로 1977년 1월에 개관 했으니, 1년 미만의 공사를 마치고 만들어진 뜰이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개관 당시 도서관보의 표지에 건물과 뜰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성사진에서 보면 마치 한자 서울 경(景)자를 본뜬 것 같은 정형적인 평면구조가 선명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녹지는 잔디밭으로 비워져 있고, 그 둘레를 따라 향나무며 몇몇의 낙엽수들이, 이제는 나이를 든 모습으로 공간에 위엄을 드러낸다. 나무기둥의 둘레가 오십 센티미터쯤 되는 크기의 벚나무에서 그간 뜰을 스치고 간 시간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오로지 걷는 것과 앉아서 머무는 것만 허용 되는 이 뜰은 어쩌면 북촌에 남겨진 고성(古城)과 같은 곳이다. 높은 축대의 정점에 있어서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는 않으나 위에서는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그런 요새(要塞)같은 곳. 북촌마을의 번잡함을 피해서 멀리 인왕산을 바라다보며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뜰이다.


이곳의 옛 지명은 붉은 언덕, 홍현(紅峴)이다. 겸재는 바로 이 홍현에서 여름 소나기가 막 지나간 후의 인왕산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바로 인왕제색도다. 그 때가 1751년(영조27년)이니, 우리는 이 뜰에서 좀 더 오랜 과거와도 조우하게 된다. 뜰 한 편의 회화나무 수령이 300년쯤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큰 어른인 셈이다.


여기에 학교가 처음 지어진 것은 1900년 대한제국에 의해 설립된 관립중학교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도서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세 동의 건축물은 그 후 1938년에 교명을 경기공립중학교로 바꾸면서 신축한 것들인데,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사각의 창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구성된 간결하고 모던한 느낌의 파사드는 1930년대 서양에서 유행하던 양식으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를 가진다고 하니, 그 간 수없이 보수공사를 거치면서도 원형의 훼손 없이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다시 찾은 도서관의 뜰은 한결 운치가 느껴진다. 초록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비를 흠뻑 머금은 땅으로부터 그 기운이 하늘을 치고 나갈 기세다. 오래된 파고라를 휘감은 등나무의 자태는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다. 한 뼘의 빛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완벽한 녹색의 지붕 그 자체다. 이 강렬한 녹색의 힘은 어설프게 디자인된 인조목 벤치, 아무렇게나 가져다 놓은 플라스틱 쓰레기통들, 비워진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을 법한 고전적인 모양새의 분수와 연못들조차 너그럽게 품는다.


아마도 최근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는 조악한 물레방아와 원두막도 늙은 벚나무 아래에서는 그런대로 쓰임새가 있어 보인다. 앞뜰을 지나 도서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시간과 조우한다. 옛 교사동 사이 중정 역할을 하는 긴 녹지 공간은 오래된 작은 숲이다. 비를 맞은 벚나무는 더욱 푸르고 검다. 도서관의 무거운 정적이 잠시 해소되는 곳이고, 누적된 눈의 피로가 한순간 정화되는 고마운 숲이다.


도서관 입구의 교육박물관을 지나 북촌마을로 내려가는 즈음, 낯선 건축물과 조우한다. 들어보니 얼마 전 신축된 북촌마을안내소1)란다. 지나는 관광객들을 위한 인포메이션과 작은 전시공간을 가지는 건축물인데, 썩 괜찮다. 마을길과 도서관 사이의 높은 옹벽을 털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선 모양새가 어색하지 않다. 교육박물관의 오래된 적벽돌과 ‘깔맞춤’을 하고, 기울어진 미세한 수직각의 조형도 놓치지 않은 건축가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작은 건축물의 매력은 묘하게도 화장실에 있다. 바깥에서 보면 잘 모르지만 사용하고자 안으로 들어서면, 밖 인 듯 안 인 듯 안과 밖이 절묘하게 교차되는 느낌이다. 채광이 좋고 통풍이 완벽하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어긋나게 쌓아, 불편한 시선을 살짝 가리면서도 골목길의 풍경을 훔쳐보는 묘미를 더했다.


여름의 절정을 지나고 있다. 장마는 곧 지나갈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정독도서관의 여름 뜰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좀 더워도, 비가와도, 우연을 가장해서 뜰을 걸을 것이다. 진녹의 뜰 홍현에서 겸재를, 김옥균과 서재필2)을, 그리고 도서관에 스스로 몸을 가두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꿈을 쫓았던 수많은 청춘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란다.


1) 북촌마을안내소는 건축사무소 인터커드(윤승현 소장)의 최근작으로, 2016년 국토경관디자인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 정독도서관 뜰은 과거 성삼문, 김옥균, 서재필의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2016-7/ 월간 LAK 공간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