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한동안의 어색함. 성당을 올라가는 계단 아래 모인 일행 모두는 대체로 그런 느낌이었다. 삼 년 만이라고도 했고 오 년, 아니면 그보다 더 되었다고도 했다. 너무 오랜만에 오다보니 이 우뚝 높은 종현(鐘峴)에 세워진 성당을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고. 명동은 이제 우리 세대의 기억에서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것인지, 상점거리에 넘쳐나는 외국인 관광객들 틈에서 우리말조차 낯설게 들린다.


시가지의 중심을 차지하고서 어느 방향, 어느 지점에서나 랜드마크가 되어주는 유럽의 성당과는 달리 명동성당은 이제 코앞에 다가서서야 비로소 그 수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변을 둘러싼 높은 빌딩들, 그 커다란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광고물들 사이로 백 년이 훌쩍 지난 고딕 성당의 첨탑이 간신히 눈에 들어온다.


1898년, 이 아름다운 연와조 고딕양식의 성당은 비로소 우리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결과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블랑(Blanc, M.J.G.)이 성당부지로 여기 종현 일대를 매수하여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892년 5월에 정초식을 하고, 앞서 약현 성당(지금의 서울중림동 성당)을 설계한바 있는 프랑스 신부 코스트(Coste,E.J.G.)가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서양건축에 대한 기술자가 없었기에 벽돌공, 미장공, 목수 등을 모두 중국에서 데려와 일을 시켰는데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 후 종현 일대에는 가톨릭 관련 시설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서게 되어 현재는 사제관, 교구청, 계성여고, 수녀원, 가톨릭회관(구 명동성모병원)등이 본당 주변을 둘러싸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작년에는 3년간의 공사를 끝내고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공사의 결과로서 성당 서측에 서울대교구청 신관이 들어섰다. 지상 10층 규모의 교구청 신관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외관에 적벽돌을 사용함으로써 성당과 그 주변의 오래된 건축물들과 동일한 맥락을 유지하였다는 설명이다.


10층이라는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이 신축되었음에도 그리 큰 변화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외관을 동일하게 유지한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당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한쪽으로 비켜선 탓에 성당을 바라보는 정면성을 해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이 앞서 느낀 어색함 혹은 당혹함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1단계 공사는 교구청 신관의 신축만이 아니라 가톨릭 회관과 신축 교구청을 지하를 연결하는 공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지하공간은 현재 ‘1898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주차장 및 카페와 같은 편의시설, 서점, 갤러리 같은 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하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 성당 진입로 공간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수년 만에 이 곳을 들른 방문자들을 낯설게 만든 이유다.


한여름을 막 지나 가을의 문턱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도 짙은 녹색의 맹렬함은 여전하다. 얼핏 ‘너무 많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간을 가득채운 관목 숲이 이제 준공 일 년을 맞는 공간답지 않게 풍성하다. 경사진 사면을 따라 심어진 녹색의 덤불 너머로 첨탑이 보이는 풍경이 참 생경스럽다. 삭막한 도시에 푸른 녹색을, 그것도 밋밋한 잔디가 아닌 꽃이 피는 관목덤불로 만들어진 정원이니 즐겨 맞이해야 마땅할 것인데, 선뜻 그러지 못함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명동성당은 신자와 사제들의 공간을 넘어 소외되고 고통 받는 모든 시민들의 성지였다. 매캐한 최루가스를 헤쳐 도달한 곳이 이곳이었으며, 백골단의 곤봉을 피해 골목길을 내달려 오른 피신처가 이곳이었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수배된 학생들의 최종 은신처이자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의 천막이 장기간 펼쳐진 마당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경’으로 치장된 바로 이 공간이 힘없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시민들을 위로하고 응원했던 마당이자 광장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한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한 시대의 선명한 기억이 그 시대를 몸으로 경험한 세대에만 유효하다면 미래의 희망은 없다. 화목으로 가득 찬, 그래서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화단을 바라보면서, “100년 전 초기 명동성당 진입로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설명은 어딘지 좀 구차하게 들린다.


발길을 성당 뒤쪽으로 옮긴다. 마리상이 있는 작은 동산이 나온다. 수목의 종류가 제법 많다. 오래된 나무들이지만 전정을 잘 해 놓으니 시골 촌로가 잔칫날에 앞서 이발소를 다녀간 모습이다. 비록 세련된 느낌은 없지만 푸근하고 정겨움이 배어 있다. 우리 일행도 잠시 느티나무 그늘에 앉았다. 담장 넘어 계성여고가 있고 성바오로수녀원도 보인다. 족히 50년은 넘어 보이는 우람한 나무그늘에 앉으니 편안하다.


높다란 본당이 주변의 복잡한 도시를 적당히 가려준다. 신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놀러 나온 시민들도 눈에 띈다. 프랑스 신부의 설계로 중국인들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성당,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살짝 보여주는 돌쌓기나 가이즈까의 조형, 비교적 최근에 공사한 것으로 보이는 유럽식 돌포장, 한국적 전통을 이식해 놓은 사고석 담장까지 눈에 보이는 디테일에서도 역사가 읽힌다. 부조화 속의 조화란 이런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명동성당의 주보성인인 무염시태 마리아상에는 오늘도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이 이어진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다.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모두가, 아니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한테만 유독 힘든 요즘, 더 많은 위로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날 그 광장과 마당에 모인 이들의 함성과 온기가 그립다.


2015-9/ 월간 LAK 공간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