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힘들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장기 불황에 메르스의 여파까지 겹쳐서,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공현장은 때 아닌 가뭄과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지인들 중에는 설계 계약에 문제가 생겨서 곤란을 겪는 분들이 종종 있다. 경기가 좋고 프로젝트들이 잘 돌아간다면 별 문제가 안 되겠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보니, 작은 계약에 문제가 생겨도 소형 사무실로서는 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는 오직 설계 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몇 해 전, 미국 LA 카운티 정부로부터 설계 의뢰를 받아 작업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현장 방문 이전에 계약관련 문서를 메일로 주고받으며 협의를 한 후, 킥오프 미팅을 위해 현지를 방문하고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미팅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계약서에 날인하는 행위가 거의 형식에 가깝다보니 기계적으로 수 분만에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날 그 곳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금액이 그렇게 큰 프로젝트도 아니었지만 계약 당사자는 물론 담당 변호사까지 참석을 해서 수십 쪽에 달하는 모든 조항들을 직접 큰 소리로 낭독하고 문제가 없는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하였다.
두 세 시간에 걸친 이 생경한 절차를 마무리하고는 한국에 돌아가서 고문 변호사의 확인을 받아 달라고 요구 하는데, 일단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변호사도 없을 뿐 아니라 이렇게 진지하게 계약서를 써 본 일도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우리 ○○와 계약상대자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붙임의 계약문서에 의하여 위 기술용역에 대한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신의에 따라 성실히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확약하며, 이 계약의 증거로서 계약서를 작성하여 당사자가 기명날인한 후 각각 1통씩 보관한다」
보통 설계 프로젝트를 위한 표준 계약서에는 이런 좋은 문구가 보통 맨 앞에 쓰여 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약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상호대등’한 입장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계약서는 설계자의 당연한 권리보다는 발주자의 편의와 책임회피를 위한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불평등한 조항들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별지의 ‘특약사항’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많다.
모든 설계작업(design service)은 당사자 간의 ‘합리적인 계약’을 통해 성립되어야 한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계약행위가 오랜 관행과 형식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종류의 계약은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체결하는 것이다. 작업이 문제없이 잘 진행된다면, 프로젝트가 종료할 때까지 계약서를 들춰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계자는 ‘을’로 통칭되는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설령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문제를 법적으로 쟁점화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좋은 디자인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설계 계약서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충분히 실효성을 가지는 문서로 작동해야 한다.
첫 번째는, 발주자와 설계자가 대등한 입장에서의 의사소통이 보장되어야 한다. 계약 당사자 간은 상하관계에 있지 아니하므로, 위계질서를 암시하는 용어들 즉 ‘갑’과 ‘을’, ‘지시’, ‘보고’, ‘납품’ 등과 같은 용어는 폐기되어야 하며, ‘건축주(혹은 발주자)’, ‘설계자’, ‘협의’, ‘설명’, ‘제출’ 등의 수평적 용어로 대치되어야 한다. 아울러 발주자의 책임과 의무 역시 자세히 규정해야 하고, 특히 저작권 보호를 위한 조항도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설계 계약서에는 창작물에 대한 설계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단계에서 발생한 성과물의 저작권과 포괄적인 사용권을 발주자에게 귀속시키고 있다. 이는 명백한 횡포이며 국제적인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
설계 작업의 결과물은 물건의 형태로 생산되고 양도되는 상품과는 달라서 돈을 주고 산 사람에게 모든 권리가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계약과 관련하여 발생한 설계도서의 저작권은 당연히 설계자에게 귀속되는 것이며, 발주자는 설계자의 동의 없이 결과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양도할 수 없어야 한다. 저작권 문제가 어떤 경우에는 작품 표절과도 연결되어 법적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설계자의 작업이 창의적 행위로 존중받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숙련된 기술자의 반복적인 업무로만 이해되고 있는지를 판가름 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좋은 계약서라 함은 수평적 의사소통을 위한 장치, 계약 당사자 간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설계자의 저작권 보호에 대한 조항들이 구체적으로 담겨져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모든 설계 작업의 내용과 성과물은 계약서에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규정되어야 한다. 작업은 아주 구체적으로 작성된 과업내용서에 규정한대로 발생시켜야 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업무처리에 대한 사항도 합리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설계계약은 작업의 기간과 작업량, 그 난이도에 비례하여 금액을 산정한다.
그러나 작업 진행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기 쉬운데 이럴 경우를 대비한 조항들이 실질적으로 적용되고 작동되도록 명시해야 한다. 작업량이 늘어나거나 기간이 연장되면 당연히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조항들이 촘촘히 기술되어 있어야 발주자가 임의로 기간을 연장하거나 불필요한 업무를 반복하는 일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많은 사무실들이 계약에 규정되지 않은 과외의 작업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곧 금전적인 손해로 직결된다. 이런 불합리한 관행 속에서 좋은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만들어질 수 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의 두루뭉술한 계약서는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설계자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발주자와 설계자의 신의는 서로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구체적인 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다. 관례에 익숙한 발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불편하고 생소한 조항들을 그들이 먼저 나서서 기술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변화의 주체는 늘 먼저 나서는 말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평만 하다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계약서도 잘 쓰고, 설계도 잘 해야겠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2015-6/ 한국조경신문 칼럼
모두가 힘들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장기 불황에 메르스의 여파까지 겹쳐서,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공현장은 때 아닌 가뭄과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지인들 중에는 설계 계약에 문제가 생겨서 곤란을 겪는 분들이 종종 있다. 경기가 좋고 프로젝트들이 잘 돌아간다면 별 문제가 안 되겠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보니, 작은 계약에 문제가 생겨도 소형 사무실로서는 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는 오직 설계 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몇 해 전, 미국 LA 카운티 정부로부터 설계 의뢰를 받아 작업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현장 방문 이전에 계약관련 문서를 메일로 주고받으며 협의를 한 후, 킥오프 미팅을 위해 현지를 방문하고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미팅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계약서에 날인하는 행위가 거의 형식에 가깝다보니 기계적으로 수 분만에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날 그 곳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금액이 그렇게 큰 프로젝트도 아니었지만 계약 당사자는 물론 담당 변호사까지 참석을 해서 수십 쪽에 달하는 모든 조항들을 직접 큰 소리로 낭독하고 문제가 없는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하였다.
두 세 시간에 걸친 이 생경한 절차를 마무리하고는 한국에 돌아가서 고문 변호사의 확인을 받아 달라고 요구 하는데, 일단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변호사도 없을 뿐 아니라 이렇게 진지하게 계약서를 써 본 일도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우리 ○○와 계약상대자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붙임의 계약문서에 의하여 위 기술용역에 대한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신의에 따라 성실히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확약하며, 이 계약의 증거로서 계약서를 작성하여 당사자가 기명날인한 후 각각 1통씩 보관한다」
보통 설계 프로젝트를 위한 표준 계약서에는 이런 좋은 문구가 보통 맨 앞에 쓰여 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약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상호대등’한 입장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계약서는 설계자의 당연한 권리보다는 발주자의 편의와 책임회피를 위한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불평등한 조항들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별지의 ‘특약사항’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많다.
모든 설계작업(design service)은 당사자 간의 ‘합리적인 계약’을 통해 성립되어야 한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계약행위가 오랜 관행과 형식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종류의 계약은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체결하는 것이다. 작업이 문제없이 잘 진행된다면, 프로젝트가 종료할 때까지 계약서를 들춰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계자는 ‘을’로 통칭되는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설령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문제를 법적으로 쟁점화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좋은 디자인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설계 계약서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충분히 실효성을 가지는 문서로 작동해야 한다.
첫 번째는, 발주자와 설계자가 대등한 입장에서의 의사소통이 보장되어야 한다. 계약 당사자 간은 상하관계에 있지 아니하므로, 위계질서를 암시하는 용어들 즉 ‘갑’과 ‘을’, ‘지시’, ‘보고’, ‘납품’ 등과 같은 용어는 폐기되어야 하며, ‘건축주(혹은 발주자)’, ‘설계자’, ‘협의’, ‘설명’, ‘제출’ 등의 수평적 용어로 대치되어야 한다. 아울러 발주자의 책임과 의무 역시 자세히 규정해야 하고, 특히 저작권 보호를 위한 조항도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설계 계약서에는 창작물에 대한 설계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단계에서 발생한 성과물의 저작권과 포괄적인 사용권을 발주자에게 귀속시키고 있다. 이는 명백한 횡포이며 국제적인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
설계 작업의 결과물은 물건의 형태로 생산되고 양도되는 상품과는 달라서 돈을 주고 산 사람에게 모든 권리가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계약과 관련하여 발생한 설계도서의 저작권은 당연히 설계자에게 귀속되는 것이며, 발주자는 설계자의 동의 없이 결과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양도할 수 없어야 한다. 저작권 문제가 어떤 경우에는 작품 표절과도 연결되어 법적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설계자의 작업이 창의적 행위로 존중받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숙련된 기술자의 반복적인 업무로만 이해되고 있는지를 판가름 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좋은 계약서라 함은 수평적 의사소통을 위한 장치, 계약 당사자 간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설계자의 저작권 보호에 대한 조항들이 구체적으로 담겨져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모든 설계 작업의 내용과 성과물은 계약서에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규정되어야 한다. 작업은 아주 구체적으로 작성된 과업내용서에 규정한대로 발생시켜야 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업무처리에 대한 사항도 합리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설계계약은 작업의 기간과 작업량, 그 난이도에 비례하여 금액을 산정한다.
그러나 작업 진행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기 쉬운데 이럴 경우를 대비한 조항들이 실질적으로 적용되고 작동되도록 명시해야 한다. 작업량이 늘어나거나 기간이 연장되면 당연히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조항들이 촘촘히 기술되어 있어야 발주자가 임의로 기간을 연장하거나 불필요한 업무를 반복하는 일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많은 사무실들이 계약에 규정되지 않은 과외의 작업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곧 금전적인 손해로 직결된다. 이런 불합리한 관행 속에서 좋은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만들어질 수 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의 두루뭉술한 계약서는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설계자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발주자와 설계자의 신의는 서로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구체적인 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다. 관례에 익숙한 발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불편하고 생소한 조항들을 그들이 먼저 나서서 기술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변화의 주체는 늘 먼저 나서는 말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평만 하다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계약서도 잘 쓰고, 설계도 잘 해야겠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2015-6/ 한국조경신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