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을 보는 두 가지 방법

설계실무를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현장을 다니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현장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오갈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멀리 지방에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편이 편리할 때가 많다. 설계라는 작업이 도면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가급적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좋고, 이러한 감리 행위가 있어야만 그나마 나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에, 일주일에 많게는 서너 번을 이 현장 저 현장으로 다니게 되는 것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운전하고 어떤 목적지에 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두툼한 지도책을 펼치고 도로망을 살펴서 가장 적합해 보이는 경로를 운전자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였다. 이에 더해 옆자리에 지도책을 살뜰히 챙기는 조력자가 동승할 수만 있다면 비록 초행길이라도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가 있었다. 요즘에는 이런 지도책들이 아직도 발행되고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새로운 IT 기기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동승자가 없어도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아무리 초행길이라도, 하물며 외국의 낯선 시골길이라도 두렵지가 않다. 최적의 경로를 순식간에 검색해 줄 뿐 아니라, 아무리 지정 경로를 벗어나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그 때마다 친절하게 대안을 찾아 준다. 어떨 때는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네비게이션도 가끔은 오작동을 하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게 되는 경우를 운전자라면 아마도 한두 번쯤 경험해 보았으리라. 입력된 주소 데이터가 오류인 경우도 있고, 내가 잘못된 주소를 입력한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철저히 믿었다가 배신을 당한 셈이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운전자 중심으로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방향을 항상 정면으로 보여준다. 지도의 방위와 상관없이 나를 중심으로 지도의 방향이 그때그때마다 바뀌는 방식이다. 운전자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네비게이션의 안내대로 앞으로 만 가면 된다. 두 번째 방법은 운전자 중심이 아니라 고정된 방위로 경로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화면의 위쪽이 항상 북쪽으로 고정된 상태에서 경로를 안내한다. 예를 들면 차량이 서쪽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지도상으로도 서쪽, 그러니까 화면의 왼쪽방향으로 진행 경로를 표시한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첫 번째 모드 즉 운전자 중심 모드를 선호하지만, 길을 잃게 되는 경우도 바로 이 모드에서다. 목적지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차량이 가고 있어도, 당장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좀처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판단의 중심이 운전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정된 방위 모드의 경우는 경로를 직관적으로 보기에 좀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 경로 상에서 차량이 움직이는 방향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차량을 운전할 염려가 거의 없다. 당연히 내가 중심이 아니라 지도와 방위를 중심으로 경로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어쩐지 이 네비게이션을 지표 삼아 차량을 운전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특히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은 더욱 그러하다. 설계라는 작업을 하다보면 처음에 어떤 목표지점을 잘 설정했다 하더라도 순간의 판단 오류에 빠져서 영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몰고 가는 경우가 있다. 판단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은 소통부족, 과욕, 정도를 벗어난 자신감, 부주의, 조급함처럼 나를 중심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 기인한다. 내가 가는 방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적어도 조경이라는 분야가 인류의 유한한 자원인 ‘토지’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식물과 환경을 작업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면, 더욱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보편적 행복을 존중해야 한다면, 이러한 중요한 가치들이 네비게이션의 고정된 방위처럼 작업의 우선적인 지표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가야 할 경로를 벗어나서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경학회가 주관하여 2013년 가을에 제정한 한국조경헌장은, 이 시대에 조경계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지표를 헌장이라는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정 당시 조경학회와 관련단체 홈페이지 대문에 게시하여 누구나 쉽게 읽어보고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자 했는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러한 의도가 식어버린 느낌이 들어서 당시에 제정 작업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지면을 빌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의 작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피고 항상 둘러보자는 의미에서 조경헌장 전문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조경은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이다.


조경은 건강한 사회의 척도이고 행복한 삶의 기반이다. 조경은 생태적 위기에 대처하는 실천적 해법을 제시하고, 공동체 형성을 위한 소통의 장을 마련하며,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경관을 구현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환경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은 조경의 책임이자 과제이다.


자연은 생명의 원천이다. 지구에는 다양한 동식물종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조경은 이들의 건강한 공생을 중시한다. 자연은 현 세대를 위한 소비의 대상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자원이다. 조경은 자연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어 온 부조화를 해소하고 상처받은 자연을 건강하게 치유한다.


삶의 터전은 유한한 공간이자 공공의 자원이다. 사회 구성원은 이 터전을 지혜롭게 공유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조경은 시민의 공공적 행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조경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공공 환경을 조성한다.


인류가 축적해 온 인문적 자산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조경의 토대이다. 조경은 역사성, 지역성,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창의적 예술 정신을 지향한다.



2015-4/ 한국조경신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