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포비아(agoraphobia)


1.

‘광장공포증(agoraphobia)’에 대한 정의는 전문분야 마다 조금씩 상이하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붐비는 낯선 공공장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 혼자 놓이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하여, 비이성적인 공포를 느끼는 일종의 공황장애로 설명하는 반면 건축분야에서는 광장과 같이 개방되고 넓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증상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실체적인 공간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설계자들에게도 일종의 광장 공포증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의학적, 심리학적 정의에 속하지 않는, 조금 부연한다면 ‘광장설계공포증’이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공간을 다루는 조경가 혹은 건축가들에게 간혹 나타는 불안증세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설계(design)라는 작업의 끝은 결국 실체적인 공간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도면 위에 그려지는 수많은 선들과 기호들은 곧바로 물리적 재료로 치환되고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 내거나 점유하게 된다.


공간을 구축하거나 조직하는 행위는 대체로 무엇인가를 더하는 행위인데, 광장은 무엇인가를 담기위해 비워진 상태를 유지해야(혹은 유지할 수 있어야)하는 공간이므로, 광장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정의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 더욱이 설계라는 과정을 통해 ‘광장’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문적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 광장설계공포증의 불안증세는 최고조에 이른다.


2.

이상적인 도시에서 공원, 광장, 가로로 대표되는 오픈스페이스(openspace)의 적절한 역할분담은 대중들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공원은 자연을 만나는 곳이다. 자연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도시는 공원이라는 안전한 대체재(代替財)를 통해 최소한의 염치(廉恥)를 표하는 바이니, 적어도 공원면적의 총량은 자연을 대하는 도시경영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광장은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 놓이는 불안과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지는 불안 모두를 광장공포증의 증세로 이해해야 한다면, 광장은 모두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밀도로 대중적 소통을 지향해야 한다. 가로는 삶의 현장이다. 피할 수 없으니 우리는 다 같이 길 위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안전하고 쾌적하며 효율적인 가로의 구성은 도시가 누구를 위해 기능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좋은 정치는 오픈스페이스의 총량을 늘려나가기 위한 진정성 있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이며, 좋은 행정은 치우침 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공간에 접근할 수 있게 효율적인 배분을 실천하는 것이고, 좋은 디자인은 사용자가 불편 없이 공간을 이용하여 정치와 행정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잘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3.

IT기술에 힘입어 전통적 광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이버 광장이 등장한지 이미 오래고, 지금 우리는 그 최전선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간을 들여 이동하고, 기꺼이 내 몸을 움직여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가상이 아닌 실존하는 공간의 힘을 공유하고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도시는 광장을 품고 있고, 모든 광장은 도시에 의해 정의된다. 수많은 건축물들 사이에 남겨진 소박한 보이드(void)로, 혹은 강력한 상징을 설파하는 권위적인 랜드마크(landmark)로 작동하기도 한다.


광장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반드시 안과 밖이 존재한다. 도시라는 맥락에서 보면 광장이라는 보이드는 늘 매스(mass)와 더불어 해석된다. 매스는 공간점유의 주체이면서 보이드를 위한 경계가 된다. 광장의 공간감은 이차원적 면적이 가지는 규모가 아니라 삼차원적 형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떤 경우라도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반드시 면적으로 표기되는 ‘크기(volume)’를 가지기 마련이고 이 ‘크기’는 공간감을 형성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전통적으로 광장의 공간감은 도시적 콘텍스트(context)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주변 건축물과의 관계, 공간의 형태, 사람들의 움직임, 햇빛과 그늘, 도시의 소음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특히 광장의 규모와 형태는 자동차가 점유하는 공간 즉 도로를 포함하여 건축물과 같이 그것을 둘러싼 물리적 구조물들과 길항(拮抗)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가 넘치면 하나가 모자란다. 이 경우 적절한 균형이란 규모나 형태의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공간이 가지는 기능과 가치판단에 의해 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광장의 바닥은 판(板)이다. 판은 형태를 가진다. 공간을 구성 하는데 있어서 판의 형태(form)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지만, 설계자의 취향이 개입될 여지는 많지 않다. 건물들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규모의 광장 뿐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만들어지는 광장 역시 도로의 연결과 소통, 주변 경관을 고려한 위요감, 집분산의 용이성 등을 여러 측면에서 살피게 되므로, 형태지향적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원형이나 방형, 장방형이 가지는 공간활용의 차이점과 심리적인 측면을 전적으로 외면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광장의 공간감은 의외로 모든 활동들이 소거된 ‘빈 광장’일 때 잘 드러난다. 나무들의 아름다움도 모든 잎들이 다 지고 난 겨울 나목(裸木)일 때 더욱 운치있게 보이는 것처럼, 광장이라는 공간 또한 떠들썩한 행위들이 모조리 사라진 그 때가 아름답다. 미세한 빛과 바람의 흐름이 드러난다. 작은 소리도 쉽게 공명되고, 예상치 못한 사소한 움직임도 잘 포착된다. 어느 순간 광장의 관찰자가 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빈 광장을 홀로 걷는 일은 즐겁다. 광장은 다수의 군중들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시에 더 많은 광장들이 필요한 이유다.


4.

공간이 정의되면 비로소 의장(意匠)이 개입한다. 전통적인 광장, 특히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에서, 의장은 광장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언어로 작동했다. 축선을 강조하는 수목의 배열, 비스타(vista)의 정점에 놓이는 조형물, 화려한 바닥 문양, 공간의 구심점을 차지하는 분수대, 도열하듯 공간을 에워싸는 장식적인 열주들까지 광장의 판을 점유하는 의장들은 철저히 하나의 지향점을 갖는다.


이 경우 광장의 주체는 대중(大衆)이 아닌 공간 그 자체가 된다. 아마도 대중은 공간의 권위를 위해 봉사하는, 동원되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권위주의의 시대를 한참 지나왔다고 말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 시대의 관성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싶다.


평면도(plan)에서 드러나는 반듯한 바닥면은 광장면적의 전체이고, 그래서 수많은 개입자들은 저마다 평면 도안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다. 의미를 강요당한 문양과 기호들이 광장의 바닥면을 차지하는 순간 광장은 본질을 잃고 한낱 재료 전시장이 되고 만다. 행정가들이 좋아하는 조악한 수준의 조형물을 비롯해서 광장을 망치는 수많은 의장요소들은, 기실 권위주의적 시대의 유산 이상을 생각해 보지 못한 무책임에서 비롯한다.


전혀 기능적이지 못한 장식적인 녹지공간, 과도한 디자인의 옥외 가구들과 사인물(signage), 현란한 형태의 야간조명들은 시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광장의 불청객들이다. 불청객들이 많으면 반드시 챙겨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된다. 난무하는 개념 유희와 듣기 좋은 수많은 레토릭(rhetoric)을 뒤로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를 어떤 형태로 가공하고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최종 책임은 설계자에게 있다.


이를테면 광장의 판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굉장히 복합적인 고민을 요구한다. 도시의 바닥은 단순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 해석이 가해지는 공간이다. 이 도시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자동차로 대표되는 기계와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며, 자연과 에너지 문제에 대처하는 도시경영의 철학이 드러나기도 한다. 역사에 대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료가 가지는 순수한 물성에 집중하더라도 그것만이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의장(意匠)의 사전적 의미는 ‘시각을 통하여 미감(美感)을 일으키는 것. 물품의 형상, 모양, 색채 또는 이들을 결합한 것’이라 정의한다. 시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미감은 문화적 산물이다. 그래서 개인의 공간을 벗어난, 공공의 영역을 점유하는 모든 의장적 요소들은 마땅히 문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한다.


사소하게 여겨지는 바닥포장의 재료에서부터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놓여지는 벤치나 휴지통까지 도면에 표기되는 모든 것들은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광장 설계에 있어서 설계자의 역할은 이러한 요소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설계행위에 있어서 심도 있는 사유(思惟)가 힘든 일이지 그 이후에 작도(drawing)에 들어가는 수고는 의외로 간단하다.


5.

덴마크 코펜하겐에 근래에 조성된 수퍼킬렌(Superkilen)이라는 공간은 서민주거지에 거대한 쐐기(kilen)형태로 조성된 광장형 공원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 차례 건축상을 수상하였고, 수많은 매체에 소개되었다. 녹색의 마운딩을 중심으로 하는 공원 영역을 제외하면, 강렬한 붉은색의 젊은이들의 공간과 다국적 문화적 요소들로 재구성한 검은(black) 광장은 운동과 놀이, 공연과 같은 도시적 기능을 담아내는 도시광장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준공 직후에 보여 준 화려한 이미지 이면에는 현실적인 문제점들이 숨어 있었다. 강렬한 색상의 바닥 페인팅은 비가 오면 미끄럼이 심해져서 자전거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고, 온통 낙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놀이공간의 바닥면은 완충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어서 이용이 금지 되었다.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취지에서 각각의 도시를 상징하는 장치물들을 광장으로 이식하거나 재현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유발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집값이 하락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설계의 의도가 좋았다고 결과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노출된 현실적 문제들을 조정하고 개선해 나가겠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좋은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6.

광장은 대중 민주주의(mass democracy)의 상징이면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통치 도구이기도 하다.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광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사용된다. 도시공간을 다루는 모든 전문직 군에서 광장은 늘 뜨거운 화두이며 진화하고 있는 실체다. 공간이 구현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겠지만, 결국은 설계자의 도면 위에서 ‘작도(作圖)’라는 행위로 구체화 된다. 설계자의 생각은 집요해서 공간을 읽는 순간부터 종이 위에 연필을 그어 나가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에 광장에 드러난 물성(物性)은 오히려 중성적이다. 대중을 사로잡는 광장은 기실 물성에 관대하다. 설계자의 편협한 시선, 행정가의 편견이 물성을 과신하는 오류를 낳는 것이다. 얕은 사유를 과도한 물성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설계자들이 느끼는 아고라포비아 증상이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광장이라는 공간이 정의되고 성립되기 위해서는 입안자부터 사용자까지 모든 관계인의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충돌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어설픈 합의와 적당한 수사(修辭)는 결국 모든 불씨를 설계자에게 책임 없이 위임하게 한다. 광장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광장을 설계하는 행위 역시 진화해야 한다.


좋은 광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위대한 설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적인 ‘협력(co-work)그룹’, 뛰어난 집단지성(集團知性)이 있을 뿐이다. 아그라포비아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2017-2/ 월간 LAK 광장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