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설계사무소 소장들의 일상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설계안을 구상하고 발전시키고 완성해나가는 본연의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설계’라는 현실적 경제활동을 작동하게 만드는 여타의 행정행위들이다.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며 그것이 잘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후자의 작업은 설계작업이라는 본업에 밀려 쉽게 부수적인 업무로 방치하기 쉽지만, 그 결과 어느 순간 너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계약’이라는 법적 행위에 서명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이 수립되어야 하고 이 전략은 상호배려라는 상식적 토대에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계약서가 좋은 설계안을 만드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확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 제안서(proposal)를 잘 만들자
모든 설계계약은 반드시 ‘제안’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니까 계약의 출발은 제안에서 시작된다. 어설픈 시작은 어설픈 결과를 맺기 십상이므로 제안서를 잘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설계작업은 아무리 고급스럽고 멋진 성과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보고서나 도면집, 모형물 따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설계안이라는 창작물에 대한 평가,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창작물을 만들기까지 투입된 전문 인력의 인건비와 기술력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인 듯싶지만 많은 경우에 제안과정이 대단히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모든 가격 제안에는 반드시 인력투입에 대한 내용이 명기되어야 한다. 공사예가가 정해진 때에는 통상 공사비의 요율에 따라 설계비를 산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공사비에 대한 설계비가 통상적인 범위보다 과다 혹은 과소로 책정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참고로만 삼을 뿐, 설계비의 제안은 최종적으로 투입 인건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이 제안을 통해 건축주 (혹은 의뢰인)에게 이 작업을 위해 몇 명의 인원이 얼마동안의 시간을 사용하는지를 알려 주고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 과업기간을 월 단위가 아닌 주 단위로 환산하고, 주 당 몇 명의 인원이 투입되는 지를 표로 정리하는 방법이 유용하다.
그 다음으로 구체적인 인력투입계획을 수립해야한다. 대부분의 민간 건축주들은 전문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과업의 기간과 투입되는 총인원으로 만으로는 건축주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왜 그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자료조사, 현장답사, 프레젠테이션 준비, 보고서 편집, 도면 리뷰, 담당자 협의 등에 소요되는 투입 인력별 투입시간(반일 0.5, 하루 1.0 등으로 구분)들을 자세히 분류하고, 이에 합당한 보수를 책정해야 한다. 필자는 통상 전체 금액만을 제시한 경우보다 자세한 산출내역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좀 더 계약에 유리했던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가급적 ‘제안설계’의 단계를 갖는다. 많은 경우에 가격 제안만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 설계자가 건축주의 요구 조건을 얼마나 충족할 수 있을지, 설계자의 능력이 과연 신뢰할 만 한지를 가늠하는 절차가 제안설계(design proposal) 단계다. 일을 주고받는 자들의 관계가 오랫동안 신뢰를 구축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상호간에 탐색이 필요하고 결과에 따라, 비용을 떠나서 이 계약관계를 맺을 것인지 아니면 없던 일로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필자는 통상 2주 정도의 기간에 프로젝트의 개념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기본구상안(concept design)을 제안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비용은 별도로 계상한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이 작업에 소요된 비용은 자동적으로 본 계약에 포함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안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비용을 정산하게 된다. 실제로 본 계약이 무산되고 제안설계에 대한 비용만 정산 받은 일은 거의 없었지만, 설계자의 중요한 창작행위를 단지 비용을 감내하는 영업활동의 일부분으로 보는 일부 건축주들의 관행에 대항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조건으로 제안을 하는 경우 제안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축주들이 훨씬 많다.
어떤 경우든 과업내용서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계약의 중요한 전 단계인 ‘제안’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것은 프로젝트의 업무범위, 기간, 설계비, 성과품 등에 대한 내용이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서 협의(합의)된 모든 내용을 계약서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안서는 논의를 위한 일방적인 제안이지만 계약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쌍방의 합의행위다. 통상적으로 설계계약서는 ‘일반계약조건’과 ‘과업내용서’로 구성된다. 일반계약조건의 경우 표준적인 양식이 있어서 대체로 그 틀 안에서 작성이 되지만, 과업내용서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각각의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통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민간 프로젝트의 과업내용서는 문서 1~2쪽 분량의 비교적 간단한 내용(업무내용과 성과물 정도를 기술한)이고, 반대로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의 발주부서가 작성한 ‘과업지시서’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원칙론과 고압적인 지시문이 포함된 수 십 쪽의 문서의 형식을 갖는다. 실제로 쌍방 간에 필요한 내용을 잘 선별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하는 과업내용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먼저, 과업 이해당사자간의 책임관계를 분명히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야 한다. 몇 해 전 국내 모 기업에서 발주한 건축물 신축공사의 설계에 참여해서 외국 설계사의 과업내용서(Scope of Services)를 참고한 경험이 있다. 이 과업내용서의 첫째 장은 각 설계주체들 간의 역할 및 책임한계를 규정하는 내용이다. 건축주, 해외 설계사, 국내 설계사, 협력 설계사(인허가, 토목, 전기, 기계 등), 조경 설계사 등의 업무 범위를 기술하고 각 업무마다 책임수행(P), 지원수행(S), 책임없음(N)을 구분하는 작업이다.
실제로 설계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작업의 수행 주체가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작업 내용이 누락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을 떠맡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공종(건축, 토목, 기계설비)과 연관되는 작업에 대해서는 미리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내용을 우선적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업무(TASK)별로 해당 내용을 최대한 상세히 기술한다. 앞서 제안서 부분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듯이, 설계작업에 대한 대가는 각 업무에 투입된 전문인력의 투입량을 기반으로 산출된다. 업무량이 많으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설계사무소들의 고민은 산출된 기준보다 훨씬 많은 투입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여기서 업무효율은 일단 논외로 한다).
이 경우 구체화되고 합리적으로 기술한 업무(TASK)수행표가 있다면 이를 기반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 설계비를 요청할 수 있다. 업무 수행표에는 반드시 해당 업무에 전문인력별(기술등급별) 투입량을 적시하여 그 합계가 설계비 구성 중 직접인건비의 산출량과 동일하도록 작성해야 한다. 이 업무 수행표에는 일반적인 설계작업 이외에 현장조사, 자료조사, 실무자협의, 모형제작, 보고서 편집, 프레젠테이션 준비 등 부수적인 작업에 소요되는 업무를 망라하여 해당 인력의 반입(0.5일) 혹은 전일(1.0일) 투입 여부까지 구분해서 작성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아주 구체적인 수준의 업무 수행표가 필요한 이유는 건축주 혹은 그 업무 담당자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작업이 그들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고 예측된 공정을 따라 진행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해야 함을 수시로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간섭과 우려로부터 자유롭게 일을 진행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업무내용의 기술은 계약내용을 정의하는 중요한 문서일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효율적인 인력투입을 위한 기초자료가 된다.
여기에 더해서 의사결정 방법이나 절차에 대한 내용을 기술한다. 아무리 구체적인 업무수행계획을 수립했다 하더라도 설계안의 진척은 정해진 단계별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설계안은 기본계획(혹은 계획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의 단계를 거치면서 구체화 되는데 각 단계마다의 의사결정은 다음 단계로의 작업 이행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으로 정해진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간혹 이 단계가 무리하게 반복되거나 번복되는 상황이 생기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계사의 업무수행은 불가능하게 된다.
건축주의 단순변심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횟수를 합리적으로 제한하고 단계별로 결정된 내용은 중간 성과물로 작성하여 공식의 문서를 통해 공유해야한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결정이 유보될 때는 일시적으로 과업을 중단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인력투입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과업내용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차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과업이 중단되거나 무산될 때 다툼을 최소화 할 수 있다.
계약서는 회사의 품격과 개인의 인격을 반영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 일을 주는 이들은 일을 받는 이들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계약서를 만들고자 한다. 도급인과 수급인의 관계는 완벽하게 평등하지 않다. 주는 이는 조금 덜 주기를 바라고 받는 이는 조금 더 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는 상식 혹은 사회통념이라는 단어를 빌어 그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계약서는 글로 이루어지고 글은 문장과 단어의 조합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글에는 문장과 단어를 선택하고 기술한 사람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건조한 문장으로 만들어진 계약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관례적으로 표현된 용어들이라고 대충 무시하고 지나 갈 것이 아니라, 과연 그 표현이 계약 쌍방 간의 관계를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보여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용역’, ‘갑을’, ‘지시’, ‘보고’라는 네 단어는 계약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먼저 ‘용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굉장히 포괄적인 문장이라 사회적 의미가 잘 표출되지 않지만, 우리에게 와 닿는 용역이라는 표현은 설계 서비스(service)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리 적합한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가령 ‘설계용역’이라고 쓰고 ‘설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행위’라고 번역하라는 말인데, 설계작업의 창의적 본질은 사라지고 발주처의 요청에 의해 도면 작성을 대행하는 노무행위로 오해받는 기분이라 섭섭하고 꺼림직 하다. 당장 적당한 대치어가 생각나지는 않지만 일단 ‘과업수행’이라는 말로 바꿔만 봐도 느낌은 좀 다르게 다가온다.
‘갑과 을’이라는 말은 그동안의 사회적 논란을 통해 많이 순화 된듯하지만 아직도 계약서의 매 문장마다 수없이 반복되는 단어다. 단순히 도급인과 수급인을 지칭하는 기호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몰상식이 자행된 터이니, 이 기회에 계약서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갑은 건축주(혹은 의뢰인, 발주자)로, 을은 설계자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많은 회사들에서 더 이상 이 용어를 쓰지 않고 있으므로, 관례라는 이름으로 이 용어를 고집한다면 불순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건축주와 설계자의 관계는 ‘지시’하고 ‘보고’ 받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다. 계약의 범위 안에서 업무수행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건축주들은 마치 설계자들을 고용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설계자들은 건축주를 고용주처럼 대하는 경우도 있다. 무심코 작성한 계약서에 을은 갑의 지시를 따르고 을은 갑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면 그 실체와 상관없이 둘의 관계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전락한다.
건축주는 설계자에게 지시가 아닌 요청을 하는 것이고, 설계자는 건축주에게 보고가 아니라 설명과 내용 공유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업지시서가 아니라 과업요청서 혹은 과업내용서가 올바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중간, 최종보고회는 중간, 최종설명회로 수정되어야 하고 보고서는 설계설명서로 고쳐 불러야 옳다.
마지막으로, 저작권(지적 재산권) 조항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분쟁의 소지가 많지는 않지만 일부 비양심적인 발주자들의 행위들로 인해 설계 저작권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필자가 수행하는 모든 계약서에는 이 조항을 반드시 명시하고 있으며, 별다른 저항 없이 확정된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계약과 관련한 모든 설계도서의 저작권은 설계자에 귀속되고, 건축주는 설계자와 협의 없이 제출된 설계도서를 사용하여 다른 곳에 조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만 건축주가 설계비를 완납한 경우에 한하여 저작권에 대한 사용권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이 만든 설계 결과물이 제3자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 역시 담고 있다.
글을 맺으며
‘계약서는 최소한의 내용으로 만드는 것이 좋고, 한 번도 다시 들춰 볼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믿음에 한동안 형식적으로만 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너무 낭만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정성껏 만들어진 좋은 계약서는 업무에 대한 집중도와 이해도를 높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존중하는 의미 있는 문서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급적 건축주와 설계자는 계약서 날인에 앞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작성된 계약서의 세부조항에서부터 과업내용서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함께 ’리딩(reading)'하고, 필요하면 묻고 설명하는 자리를 갖는 것이 좋다.
설계자가 아무리 좋은 계약서를 만들고자 해도 그 상대방이 동의하고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건축주 혹은 발주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담당자의 입장에서도 좋은 계약서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는 크다. 권위적이고 불합리한 관례 속에서 만들어진 계약서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 수 있고, 그만큼 프로젝트에 대한 효율과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이제는 일을 발주하는 주체가 먼저 나서서 바람직한 계약 문화를 이끌어 가기를 희망한다.
2016-5/ 월간 LAK 특집
대부분의 설계사무소 소장들의 일상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설계안을 구상하고 발전시키고 완성해나가는 본연의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설계’라는 현실적 경제활동을 작동하게 만드는 여타의 행정행위들이다.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며 그것이 잘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후자의 작업은 설계작업이라는 본업에 밀려 쉽게 부수적인 업무로 방치하기 쉽지만, 그 결과 어느 순간 너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계약’이라는 법적 행위에 서명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이 수립되어야 하고 이 전략은 상호배려라는 상식적 토대에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계약서가 좋은 설계안을 만드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확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 제안서(proposal)를 잘 만들자
모든 설계계약은 반드시 ‘제안’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니까 계약의 출발은 제안에서 시작된다. 어설픈 시작은 어설픈 결과를 맺기 십상이므로 제안서를 잘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설계작업은 아무리 고급스럽고 멋진 성과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보고서나 도면집, 모형물 따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설계안이라는 창작물에 대한 평가,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창작물을 만들기까지 투입된 전문 인력의 인건비와 기술력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인 듯싶지만 많은 경우에 제안과정이 대단히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모든 가격 제안에는 반드시 인력투입에 대한 내용이 명기되어야 한다. 공사예가가 정해진 때에는 통상 공사비의 요율에 따라 설계비를 산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공사비에 대한 설계비가 통상적인 범위보다 과다 혹은 과소로 책정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참고로만 삼을 뿐, 설계비의 제안은 최종적으로 투입 인건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이 제안을 통해 건축주 (혹은 의뢰인)에게 이 작업을 위해 몇 명의 인원이 얼마동안의 시간을 사용하는지를 알려 주고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 과업기간을 월 단위가 아닌 주 단위로 환산하고, 주 당 몇 명의 인원이 투입되는 지를 표로 정리하는 방법이 유용하다.
그 다음으로 구체적인 인력투입계획을 수립해야한다. 대부분의 민간 건축주들은 전문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과업의 기간과 투입되는 총인원으로 만으로는 건축주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왜 그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자료조사, 현장답사, 프레젠테이션 준비, 보고서 편집, 도면 리뷰, 담당자 협의 등에 소요되는 투입 인력별 투입시간(반일 0.5, 하루 1.0 등으로 구분)들을 자세히 분류하고, 이에 합당한 보수를 책정해야 한다. 필자는 통상 전체 금액만을 제시한 경우보다 자세한 산출내역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좀 더 계약에 유리했던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가급적 ‘제안설계’의 단계를 갖는다. 많은 경우에 가격 제안만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 설계자가 건축주의 요구 조건을 얼마나 충족할 수 있을지, 설계자의 능력이 과연 신뢰할 만 한지를 가늠하는 절차가 제안설계(design proposal) 단계다. 일을 주고받는 자들의 관계가 오랫동안 신뢰를 구축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상호간에 탐색이 필요하고 결과에 따라, 비용을 떠나서 이 계약관계를 맺을 것인지 아니면 없던 일로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필자는 통상 2주 정도의 기간에 프로젝트의 개념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기본구상안(concept design)을 제안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비용은 별도로 계상한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이 작업에 소요된 비용은 자동적으로 본 계약에 포함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안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비용을 정산하게 된다. 실제로 본 계약이 무산되고 제안설계에 대한 비용만 정산 받은 일은 거의 없었지만, 설계자의 중요한 창작행위를 단지 비용을 감내하는 영업활동의 일부분으로 보는 일부 건축주들의 관행에 대항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조건으로 제안을 하는 경우 제안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축주들이 훨씬 많다.
어떤 경우든 과업내용서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계약의 중요한 전 단계인 ‘제안’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것은 프로젝트의 업무범위, 기간, 설계비, 성과품 등에 대한 내용이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서 협의(합의)된 모든 내용을 계약서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안서는 논의를 위한 일방적인 제안이지만 계약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쌍방의 합의행위다. 통상적으로 설계계약서는 ‘일반계약조건’과 ‘과업내용서’로 구성된다. 일반계약조건의 경우 표준적인 양식이 있어서 대체로 그 틀 안에서 작성이 되지만, 과업내용서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각각의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통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민간 프로젝트의 과업내용서는 문서 1~2쪽 분량의 비교적 간단한 내용(업무내용과 성과물 정도를 기술한)이고, 반대로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의 발주부서가 작성한 ‘과업지시서’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원칙론과 고압적인 지시문이 포함된 수 십 쪽의 문서의 형식을 갖는다. 실제로 쌍방 간에 필요한 내용을 잘 선별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하는 과업내용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먼저, 과업 이해당사자간의 책임관계를 분명히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야 한다. 몇 해 전 국내 모 기업에서 발주한 건축물 신축공사의 설계에 참여해서 외국 설계사의 과업내용서(Scope of Services)를 참고한 경험이 있다. 이 과업내용서의 첫째 장은 각 설계주체들 간의 역할 및 책임한계를 규정하는 내용이다. 건축주, 해외 설계사, 국내 설계사, 협력 설계사(인허가, 토목, 전기, 기계 등), 조경 설계사 등의 업무 범위를 기술하고 각 업무마다 책임수행(P), 지원수행(S), 책임없음(N)을 구분하는 작업이다.
실제로 설계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작업의 수행 주체가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작업 내용이 누락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을 떠맡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공종(건축, 토목, 기계설비)과 연관되는 작업에 대해서는 미리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내용을 우선적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업무(TASK)별로 해당 내용을 최대한 상세히 기술한다. 앞서 제안서 부분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듯이, 설계작업에 대한 대가는 각 업무에 투입된 전문인력의 투입량을 기반으로 산출된다. 업무량이 많으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설계사무소들의 고민은 산출된 기준보다 훨씬 많은 투입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여기서 업무효율은 일단 논외로 한다).
이 경우 구체화되고 합리적으로 기술한 업무(TASK)수행표가 있다면 이를 기반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 설계비를 요청할 수 있다. 업무 수행표에는 반드시 해당 업무에 전문인력별(기술등급별) 투입량을 적시하여 그 합계가 설계비 구성 중 직접인건비의 산출량과 동일하도록 작성해야 한다. 이 업무 수행표에는 일반적인 설계작업 이외에 현장조사, 자료조사, 실무자협의, 모형제작, 보고서 편집, 프레젠테이션 준비 등 부수적인 작업에 소요되는 업무를 망라하여 해당 인력의 반입(0.5일) 혹은 전일(1.0일) 투입 여부까지 구분해서 작성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아주 구체적인 수준의 업무 수행표가 필요한 이유는 건축주 혹은 그 업무 담당자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작업이 그들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고 예측된 공정을 따라 진행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해야 함을 수시로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간섭과 우려로부터 자유롭게 일을 진행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업무내용의 기술은 계약내용을 정의하는 중요한 문서일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효율적인 인력투입을 위한 기초자료가 된다.
여기에 더해서 의사결정 방법이나 절차에 대한 내용을 기술한다. 아무리 구체적인 업무수행계획을 수립했다 하더라도 설계안의 진척은 정해진 단계별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설계안은 기본계획(혹은 계획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의 단계를 거치면서 구체화 되는데 각 단계마다의 의사결정은 다음 단계로의 작업 이행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으로 정해진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간혹 이 단계가 무리하게 반복되거나 번복되는 상황이 생기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계사의 업무수행은 불가능하게 된다.
건축주의 단순변심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횟수를 합리적으로 제한하고 단계별로 결정된 내용은 중간 성과물로 작성하여 공식의 문서를 통해 공유해야한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결정이 유보될 때는 일시적으로 과업을 중단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인력투입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과업내용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차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과업이 중단되거나 무산될 때 다툼을 최소화 할 수 있다.
계약서는 회사의 품격과 개인의 인격을 반영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 일을 주는 이들은 일을 받는 이들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계약서를 만들고자 한다. 도급인과 수급인의 관계는 완벽하게 평등하지 않다. 주는 이는 조금 덜 주기를 바라고 받는 이는 조금 더 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는 상식 혹은 사회통념이라는 단어를 빌어 그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계약서는 글로 이루어지고 글은 문장과 단어의 조합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글에는 문장과 단어를 선택하고 기술한 사람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건조한 문장으로 만들어진 계약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관례적으로 표현된 용어들이라고 대충 무시하고 지나 갈 것이 아니라, 과연 그 표현이 계약 쌍방 간의 관계를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보여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용역’, ‘갑을’, ‘지시’, ‘보고’라는 네 단어는 계약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먼저 ‘용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굉장히 포괄적인 문장이라 사회적 의미가 잘 표출되지 않지만, 우리에게 와 닿는 용역이라는 표현은 설계 서비스(service)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리 적합한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가령 ‘설계용역’이라고 쓰고 ‘설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행위’라고 번역하라는 말인데, 설계작업의 창의적 본질은 사라지고 발주처의 요청에 의해 도면 작성을 대행하는 노무행위로 오해받는 기분이라 섭섭하고 꺼림직 하다. 당장 적당한 대치어가 생각나지는 않지만 일단 ‘과업수행’이라는 말로 바꿔만 봐도 느낌은 좀 다르게 다가온다.
‘갑과 을’이라는 말은 그동안의 사회적 논란을 통해 많이 순화 된듯하지만 아직도 계약서의 매 문장마다 수없이 반복되는 단어다. 단순히 도급인과 수급인을 지칭하는 기호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몰상식이 자행된 터이니, 이 기회에 계약서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갑은 건축주(혹은 의뢰인, 발주자)로, 을은 설계자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많은 회사들에서 더 이상 이 용어를 쓰지 않고 있으므로, 관례라는 이름으로 이 용어를 고집한다면 불순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건축주와 설계자의 관계는 ‘지시’하고 ‘보고’ 받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다. 계약의 범위 안에서 업무수행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건축주들은 마치 설계자들을 고용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설계자들은 건축주를 고용주처럼 대하는 경우도 있다. 무심코 작성한 계약서에 을은 갑의 지시를 따르고 을은 갑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면 그 실체와 상관없이 둘의 관계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전락한다.
건축주는 설계자에게 지시가 아닌 요청을 하는 것이고, 설계자는 건축주에게 보고가 아니라 설명과 내용 공유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업지시서가 아니라 과업요청서 혹은 과업내용서가 올바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중간, 최종보고회는 중간, 최종설명회로 수정되어야 하고 보고서는 설계설명서로 고쳐 불러야 옳다.
마지막으로, 저작권(지적 재산권) 조항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분쟁의 소지가 많지는 않지만 일부 비양심적인 발주자들의 행위들로 인해 설계 저작권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필자가 수행하는 모든 계약서에는 이 조항을 반드시 명시하고 있으며, 별다른 저항 없이 확정된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계약과 관련한 모든 설계도서의 저작권은 설계자에 귀속되고, 건축주는 설계자와 협의 없이 제출된 설계도서를 사용하여 다른 곳에 조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만 건축주가 설계비를 완납한 경우에 한하여 저작권에 대한 사용권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이 만든 설계 결과물이 제3자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 역시 담고 있다.
글을 맺으며
‘계약서는 최소한의 내용으로 만드는 것이 좋고, 한 번도 다시 들춰 볼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믿음에 한동안 형식적으로만 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너무 낭만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정성껏 만들어진 좋은 계약서는 업무에 대한 집중도와 이해도를 높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존중하는 의미 있는 문서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급적 건축주와 설계자는 계약서 날인에 앞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작성된 계약서의 세부조항에서부터 과업내용서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함께 ’리딩(reading)'하고, 필요하면 묻고 설명하는 자리를 갖는 것이 좋다.
설계자가 아무리 좋은 계약서를 만들고자 해도 그 상대방이 동의하고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건축주 혹은 발주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담당자의 입장에서도 좋은 계약서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는 크다. 권위적이고 불합리한 관례 속에서 만들어진 계약서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 수 있고, 그만큼 프로젝트에 대한 효율과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이제는 일을 발주하는 주체가 먼저 나서서 바람직한 계약 문화를 이끌어 가기를 희망한다.
2016-5/ 월간 LAK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