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신중할 수는 없을까

나름 완벽한 설계계약서를 쓰고 의기충천하여 작업에 임하더라도 항상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다. 설계는 창의적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 과정은 지난함의 연속이다. 계약관계가 비교적 단순한 민간 프로젝트에서는 좀 덜하다. 그러나 국가 혹은 지자체가 발주하는 공공 프로젝트의 경우 작업 자체의 어려움 보다 소통의 과정이 훨씬 힘들다. 그것은 의사결정의 주체가 불분명 할 뿐 아니라, 목표가 선명하지 않은 까닭이다.


많은 이들은 이런 어려움을 설계자의 능력 탓으로 돌리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빵빵이자 돌리는 수준으로 설계를 모독하는 작업자는 드물다. 누구보다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하며 열정과 패기로 좋은 작품에 매진하는 후배 조경가들이 많다. 제도 운용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문제들을 설계자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 프로젝트는 설계안을 확정하는 단계에 있어서 수차례의 심의 혹은 자문을 받는다. 설계자는 지침에 따라 설계안을 진행시키고 그 결과물을 위원회에 상정하여,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의견을 청취하게 된다. 사안에 따라 행정적인 구속력을 가지거나 아니면 ‘권고’의 형식으로 전달되지만, 실상은 모든 위원회의 의견을 반드시 반영해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심의 현장이나 추후 문서로 전달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반대로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위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시민들의 세금이 공적으로 투입되는 사업이나 공공성이 요구되는 민간 사업에 있어서, 사업주나 설계자의 독단 혹은 실수를 막고 가장 적확하고 좋은 안을 만들어서 공공적인 가치가 실현되게 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당연히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과정이며, 최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몇몇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위원회를 산으로 가게 하는, 그래서 설계자들을 힘들게 사람들을 대체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불성실형’이다. 위원회 경력이 꽤 많으신 분들 중에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용을 미리 공부하지 않고 오기 때문에 정확한 지적을 할 수 없다. 자료를 미리 잘 들여다보지 않고 발표자의 짧은 설명만 들어서는 내용 전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 하니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반대로 하나마나한 원칙론을 강조한다. “주변 여러 분야의 의견을 잘 참고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노력해 주십시요”. 위원회는 덕담 주고받는 장소가 아니다. 회의가 끝나고 문 밖에서 해 주시길 부탁한다.


두 번째는 ‘의욕 과시형’이다. 앞서 말한 불성실형과에 반대되는 경우다. 설계는 지침서에 의해 진행되고 일정과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 자꾸 지침서에 없는 내용을 추가하려하고 일정을 뒤흔드는 의견을 낸다면 설계를 제대로 진행시킬 수 없다. 일에 대한 투지와 의욕만 본다면 훌륭하나 항상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설령 진정성 있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설계내용과는 무관한, 사업범위나 예산과 같은 행정사항에 대한 내용은 구분해서 별도의 조율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지, 설계자에게 무리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월권이다.


세 번째는 ‘자기집착형’이다. 대부분 실무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 모든 판단은 자기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에둘러 말해도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디자인 하는 격이다. 설계자가 포기할 때 까지 집요하게 의견을 내거나, 가르치려 한다. 물론 좋은 디자인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나서야할 때가 있고, 물러서서 지켜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무엇인가를 보태려고 하는 경우는 좀 낫다. 최악은 무조건 반대하는 경우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고 시작해서 ‘그건 안 된다’로 끝난다. 좀처럼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 밖에 있으면 일단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디자인이 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네 번째는 ‘청문회형’이다. 일단 호통부터 친다. 설계안을 진지하게 들여다 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사소한 오탈자에 신경질을 내고 발표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목소리가 크니 분위기를 살피지 못한다.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위압적인 자세로 부하 병사 다루듯 닦달한다. 그들에게 설계자는 한낱 ‘아랫사람’인 것이다. 이 순간 전문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취중의 안줏감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설계자는 심문받는 죄인이 아니다.


마지막은 ‘타 분야 시비형’이다. 어떤 프로젝트들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심의나 자문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인접한 분야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전문분야가 아닐 경우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를테면 기계설비 분야의 위원이 생뚱맞게 식재 수종에 대해 시시콜콜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다. 흔히 있는 일을 아니지만 설계분야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증언(?)으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한다. 특별한 의견이 없으면 그냥 없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하다. 억지로 타 분야까지 들먹이며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다고 자문비를 거둬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심의나 자문의 순기능은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작동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 또한 병행 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고생하고 만든 설계안이 몇몇 무례한 위원들의 한마디에 따라 만신창이가 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의 낭비고 인력과 돈의 낭비다.


차라리 공공 프로젝트나 공공성이 강한 민간 프로젝트의 경우, 심의에 앞서 설계 초기 단계에서부터 워크숍 같은 상설 논의기구를 운영하여 설계자와 전문위원들이 지속적으로 실질적인 대화 채널을 유지하게 하는 방안도 향후 공식적인 심의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열악한 조건에서 오늘도 밤새워 고생하는 현장의 설계자들을 지치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5-9/ 한국조경신문 칼럼